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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김환기 작가의 생애와 작품, 사랑이야기

by 리지와 함께 2023.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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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현대 미술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한국 추상미술의 아버지 김환기는 격변의 시대를 거치면서 현대 미술의 정체성을 탐색한 여정이었습니다. 그의 생애와 작품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김환기'우주'
김환기 '우주(Universe 05-IV-71 #200)'

 

생애

 

김환기金煥基는 1913년 4월 3일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931년 19세에 일본 도쿄로 밀항하여 긴조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년 만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일본 도쿄 니혼대학 예술과 미술학부를 마쳤는데 전위를 표방하는 미술단체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참여합니다. 여기서 같이 다니던 길진섭, 다시카미, 다케나, 간노 유이코, 후나코시 미에코와 함께 '백만회'를 조직합니다. 도쿄에서 그는 단체전 4번 개인전 1번을 하고 937년 연구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으로 귀국합니다. 1946년에서 1949년 사이에 서울대학교 미술대 교수를 역임하고 1952년에는 홍익대 미술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몇 차례 전시를 하다가 1956년 파리로의 유학을 결심합니다. 아내인 김향안의 내조로 파리의 입성에 성공을 하고 프랑스 파리와 니스 그리고 벨기에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프랑스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을 했습니다. 한국의 미술을 알리려고 힘쓰며 초기 작품에서 고향의 자연과 민족의 애환을 담은 표현주의 경향을 보였고 점차 추상적인 양식으로 전환을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3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다지 성공적인 유학 생활이었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귀국 후 홍익대학교 교수가 되었는데 초대 예술원 회원, 한국미술 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여 한국 미술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명예상을 수상하면서 이를 계기로 김환기는 뉴욕으로 건너가 국제 미술계의 중심에서 활동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추상 표현주의 스타일을 완성합니다. 이 시기에 그는 11년간 록펠러 3세가 설립한 아시아 소사이어티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뉴욕에 정착합니다. 여기에서 김환기의 대표작인 점면점화가 탄생하게 됩니다.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그 유명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을 출품하고 대상을 받게 됩니다. 김환기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데 몰두했습니다. 그는 캔버스 위에 놓인 점들로 우주나 자연,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며 한국 추상미술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평가받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한국과 아시아 그리고 세계 미술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평소 작품을 그릴 때 꼿꼿하게 선 채로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던 김환기는 목과 허리의 통증이 심해져 1947년 7월 13일 디스크 수술을 받게 됩니다. 수술은 잘 되었으나 병실 침대에서 낙상을 하면서 머리를 크게 다쳐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되고 인공호흡기로 연명하지만 7월 25일 뉴욕주 포트체스터에 있는 유나이티드 병원에서 오전 9시 40분에 사망합니다. 그는 뉴욕주 발할라 산마루의 켄시코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김환기의 생애는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는 개인의 고뇌와 꿈 그리고 민족의 역사를 캔버스에 담아내며 세계 무대에서 한국 미술의 독창성을 알렸습니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여전히 많은 예술 애호가들과 미술사가들에 의해 연구되고 사랑받으며 한국 미술의 위대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작품

현대 미술의 대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김환기는 추상화에 대한 그의 독특한 접근법으로 예술계에 독보적인 길을 개척했습니다. 일본의 지배 아래 문화적 정체성과 씨름하던 시기인 1913년에 태어난 김환기는 인류의 더 넓은 실존적 탐구에 반향을 일으키는 시각적 언어를 창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예술적 표현의 여러 단계를 거친 여정은 그의 작품들을 시대를 초월하고 세계적으로 울림을 주며 동양 철학과 서양 추상 예술 원리의 깊은 종합을 반영합니다. 초기에 그는 전통적인 한국의 민족 예술과 아시아 회화의 서정적인 감성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유산과 미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었는데 파리와 뉴욕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그는 서양 모더니즘의 다양한 측면들을 동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화된 형태, 미묘한 선, 부드러우면서도 심오한 색상을 특징으로 하는 그만의 독특한 추상적 스타일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김환기 작가의 상징적인 단계는 리듬과 깊이를 창조하기 위해 일련의 점들을 사용했던 '점묘법'의 시기일 것입니다. 이 점들의 표현은 서양의 점묘법의 생동감과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사회와 우주의 상호 연결성을 반영하며 교감하는 개인들 또는 실체들을 나타냅니다. 이 점들로 인해 생기는 단색의 표현들은 사색과 성찰을 불러일으키며 공간의 방대함 또는 공허함의 침묵을 반영합니다. 이 캔버스들은 물리적인 세계를 넘어서서 형이상학을 탐구하도록 초대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서사를 구현합니다. 김환기의 미술계에 대한 공헌은 그의 캔버스와 스크린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동 서양 미술 전통 사이의 대화를 열었고 시대를 앞선 두 가지 문화 교류를 촉진했는데 시각적인 경험일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추상적인 언어를 해독하고 도전하게 하는 철학적 여정이기도 합니다. 그는 한국 미술사의 중심인물로 남아 있으며 그의 작품은 전 세계의 예술가와 미술 애호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사랑 

 

김환기는 변동림과의 사랑으로도 유명합니다. 변동림은 김환기의 삶뿐만 아니라 예술 경력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개인적 차원을 넘어 예술적 차원에서도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변동림은 김환기보다 11세나 어린 여류 시인이자 소설가였는데 두 사람은 1943년 변동림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였고 변동림은 이름을 김향안으로 개명하면서 김환기를 위해, 김환기 예술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받쳤습니다. 김향안은  김환기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가로서의 역할도 했습니다. 김환기 작가가 프랑스로의 유학을 원할 때에도 혼자서 먼저 파리로 거주지를 옮기고 작업실과 전시회가 가능한지 남편이 국제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는지 조사하고 소개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그의 작업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의 사랑은 김환기의 작품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특히 그의 추상적인 점화 작품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김환기는 내면의 감정과 사색을 표현하며 때때로 변동림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녀는 그의 삶과 예술에 있어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했으며 그의 예술 세계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항상 살림이 어려웠던 그들이기에 김향기는 남편의 작품 활동에 성공을 지원하는 매니지먼트로써의 역할을 하면서 백화점 판매원으로 뉴욕 체류시절에 일을 하였고 종일 글을 옮겨 적는 필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1974년 김환기의 죽음은 너무도 뜻밖에 일이었습니다. 30년간 동고동락했던 이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김향안은 "사람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우주가 텅 빈 것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나머지 인생을 김환기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세계 유수 미술관에 김환기 작품이 소장되도록 했고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지금은 국고로 살 엄두도 내지 못하는 대표작들을 기증했습니다. 환기 재단을 설립하여 출판 사업을 벌이고 미술 평론가와 작가를 후원하는 일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건축가 우규승에게 설계를 맡겨 환기미술관을 1992년 서울 부암동에 건립했습니다. 김향안의 헌신은 단순한 배우자를 넘어 김환기의 삶과 예술에 있어 진정한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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